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0년 한국시리즈 (문단 편집) == 후일담 == *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삼성 라이온즈]]의 [[정동진(1946)|정동진]] 감독은 4전 4패로 무기력하게 재계 라이벌에게 패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그리고 후임으로 들어온 감독은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돌풍을 이끈 [[김성근]] 감독.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재임 2년 동안 PO에는 올랐지만, 삼성과는 영 맞지 않은 성과를 내면서 삼성 시절을 본인 감독 경력의 [[흑역사]]로 남기고 만다. 그리고 멀리보면 이 [[정동진(1946)|정동진]] 감독의 갑작스런 해임이 이후 [[556#s-7|삼성의 3년간의 암흑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정동진(1946)|정동진]] 감독은 1년을 쉬고 92년부터 태평양의 감독이 되었고,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또 LG에 4연패로 고배를 마셨다. 결국 정동진 감독은 현재까지 LG가 차지한 2차례의 우승을, 그것도 1승도 건지지 못한채 내주는 ~~LG 우승의 숨은 주역~~기록을 남겼다. * [[최동원]]의 현역시절 마지막 등판경기가 바로 [[1990년 한국시리즈]] 1차전(잠실)이다.[* 불펜 등판.] 본 한국시리즈를 끝으로 [[최동원]]은 은퇴한다. 그 외 한국프로야구 '''2,000번째 홈런'''의 주인공이었던 삼성 [[홍승규]]도 이 시리즈를 끝으로 은퇴한다. * 재계 라이벌이자 전자 라이벌이 격돌한 시리즈답게 양 그룹은 자사 직원들도 동원하면서 자존심 대결을 그야말로 총력전 수준으로 벌였다. * 3차전 9회말 2아웃 1루 상황에서 [[정삼흠]]은 가급적 [[이만수]]를 피하는 방향으로 승부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인천]] 감독은 정면승부를 지시했고,[* 정확하게는 [[이만수]]가 가장 좋아하는 '''바깥쪽 낮은 직구'''를 던지라고 지시했다(고 [[이종남(기자)|이종남]] 기자의 저서 중).] 결과는 2점 홈런. 비록 3:2로 이기기는 했지만 LG 입장에서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후에 밝혀지길, LG 입장에서는 (투수 리드가 약한) 이만수가 계속 안타를 치면 상대가 라인업에서 빼지 못할 테니까, 그걸 노리고 일부러(!) 한방 맞은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경기 후 [[백인천]] 감독은 정삼흠에게 '''안타나 하나 주라고 했지 정말 홈런을 맞으면 어떡하냐'''고 가벼운(?) 타박은 주었다고 한다. 거기에 [[백인천]] 감독은, 만약 삼성에서 [[박정환(1957)|박정환]]이 선발포수로 나오면 볼배합이 헷갈릴 우려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 [[이종남(기자)|이종남]] 기자의 저서 중.] 반대로 생각하면, 이만수의 볼배합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만수는 지금까지도 수비가 약한 포수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니게 된다. 물론 위에서도 적었듯, 이만수가 4차전에 선발출장하지 않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고(사실상 0%에 가까웠다) 홈런 레이스를 보면 알 수 있듯 일부러 홈런을 치라고 던져줘도 치기 힘든 만큼, [[백인천]] 감독의 면피 + 자기 과시용 발언일 가능성도 있다. * (LG가 3연승을 거둔 후) 4차전 직전, LG [[백인천]] 감독은 4차전 선발투수를 두고 고민하던 중, 후보군 중 한명인 [[김용수]]에게 '''오늘은 그냥 쉴래?'''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백인천 감독 입장에서, [[김용수]]는 1차전 선발투수였고, 팀이 이미 3연승을 한 마당에 굳이 무리시킬 필요가 있나 고민한 듯 하다. 대신 [[김용수]]를 5차전 선발투수로도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1990년]] 당시는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김용수]]는 아주 씩씩하게 4차전 선발등판 의지를 밝혔고, 결국 4차전 승리투수까지 된다. * 4차전에서 삼성은 선발 2루수로 [[강기웅]] 대신 (벤치멤버였던) [[최해명]]을 투입하고, 외야수도 (벤치멤버였던) [[정성룡(야구선수)|정성룡]]을 선발출장시키는 등 나름 충격요법을 가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최해명, 정성룡 둘 다 무안타에 그쳤다.] * [[삼성 라이온즈]]로서는 무려 5번째 한국시리즈 좌절([[1982년 한국시리즈|82]], [[1984년 한국시리즈|84]], [[1986년 한국시리즈|86]], [[1987년 한국시리즈|87]], 90)이자 LG에게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헌납하게 되었다. 하지만 12년 후 양 팀의 한국시리즈 리턴매치였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두 팀의 역사가 바뀌게 된다. * [[1990년]]은 [[KBO 리그]]를 포함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월드 시리즈]], [[일본프로야구]] [[일본시리즈]]도 모두 시리즈 전적 4승 0패로 끝난 해였다. 이 해 [[1990년 월드 시리즈|월드시리즈]]에서는 [[신시내티 레즈]]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일본시리즈에서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각각 4승 0패로 제압했다. 이후 [[2005년]]에도 [[KBO 한국시리즈]], [[일본시리즈]], [[월드 시리즈]]가 모두 시리즈 전적 4승 0패로 끝났다. * 이 시리즈 종료 후 [[FC 서울|럭키금성 황소]]가 [[K리그/1990년|프로축구에서 우승했다]]. 그러자 [[LG그룹|럭키금성 그룹]]은 야구와 축구에서 모두 우승을 거둬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10100289111013&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11-01&officeId=00028&pageNo=11&printNo=763&publishType=00010|우승! 또 우승!]]이라고 광고를 내기도 했다. * [[LG 트윈스]] 팬덤에서 1990년 한국시리즈는 첫 우승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워낙 오래전에 치러진 한국시리즈에다가 다소 싱겁게 결판이 났다는 점에서 별로 화제에 오르지 못하는 편이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당시 LG가 청룡에서 팀이 바뀐지 불과 1년만에 이룬 우승이라서 이후 등장할 1990년대 스타 선수들로 대표되는 LG의 새로운 팀 정체성이 형성되기 이전이었다는 점도 있다. 쉽게 말해 1990년의 우승은 'LG의 우승'이라기 보다 '청룡의 우승'에 더 가까웠던 셈.] 신인 3인방과 신바람 야구로 대표되는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1994년 한국시리즈|1994년]]이나 극적이고 치열했던 [[2002년 한국시리즈|2002년]]에 비해 좀 묻히는 감이 있다. * [[1994년 한국시리즈]]가 [[김재현(1975)|김재현]], [[류지현(야구)|유지현]], [[서용빈]] 등 신예들의 폭발력으로 이룬 우승이었다면, 1990년 한국시리즈는 [[MBC 청룡]]의 한을 풀어버리는 우승이었다. 청룡의 초대 감독이었던 [[백인천]]이 선수단을 이끌고 [[김재박]], [[정삼흠]], [[심재원(야구선수)|심재원]], [[김용수]], [[김상훈(1960)|김상훈]] 등 청룡의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우승했기 때문이다. * 한국시리즈를 포함해 1990년에 치러진 포스트시즌이 모두 한 팀의 싹쓸이 연승으로 끝났다. 준PO와 PO는 삼성 라이온즈가 2연승과 3연승으로, 한국시리즈는 LG 트윈스의 4연승으로 끝났다. 이는 KBO 리그에 단일리그와 준PO가 도입된 이래로 최초다. * 한국시리즈 포함 1990년 포스트시즌은 모두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마지막 경기가 치러졌다. 다만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는 삼성의 승리로 끝났지만 한국시리즈는 삼성의 패배로 끝났다는 차이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